奧宣曦 : starry miaow : SUN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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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S(2012,8,6~ l 2012. 8. 9. 00:00

말복, 2일차.

점심시간에 별 생각 없이 배식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백발의 아저씨가 옆에 와 앉았다. "어느 부서냐", "온지는 얼마나 됐냐" 등등을 물어봤다. 임원인 것 같았다. 사장인 것 같기도 하고. '돈은 엄청나게 불평등하게 주지만, 밥은 한자리에서 먹는 평등함을 추구하는 회산갑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 일어나자마자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내게 다가와서, "담부턴 여기 앉으시면 안돼요" ...핳핳 역시나...겸상하지 않으시는분인데 내가 뭣도모르고 앉는바람에 당황하셨구나...ㅎㅋ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구나, 그런 겸상...그럴 줄 알았으면, 라인 속도 조절 아저씨가 하시냐구, 좀만 늦춰달라고 쫌 해볼걸..ㅎㅎ 라인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한 아이가 내 앞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해야할 일을 도무지 해낼 수 없는 속도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뒤쳐지다보면 나중엔 걷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언니들은 '떠나는 애들' 쿨싴하게 보내고, '오는 애들'을 맞으란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힘들다고..떠나는 애들 붙잡으려 하다가는 마음만 급해서 점점 더 안된다. 독일 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혁명조직을 건설하려 했던 로자가 그런 맘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미리'가 중요하다. 미리미리...쉽지않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라인 속도, 그 구조 안에서 우리의 편익은 제로섬이었다. 내가 좀 덜하고 좀 더 편하면, 내 뒷사람은 죽어난다. 앞사람이 자꾸 꼬이고 버벅거리면 나까지 힘들다. 영화 <수영장>이 생각났다. 자유롭게,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엄마에게 "엄마의 자유때문에 주위사람이 힘들다" 했던 딸의 사무침이 떠올랐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사회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사회. 『공산당선언』에서 젤 인상적이었던 구절 중 하나. 나의 자유가 너의 불편함이 되는 사회라는 게 너무나 상식적인데,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 또 우리의 자유가 될 수 있다는 그 생각열기가 충격적이었다. 문제는 구조다. 통제할 수 없는, 미치광이 자본논리가 아니라 우리, 삶을 살아가는 살아숨쉬는 존재들이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통제한다면 그렇게 미친듯이 라인을 돌릴 필요도 없고, 눈이정말 팽글팽글 @_@ 이렇게 될 필요도 없을텐데...

한국인, 조선족, 한족, 함께 한 라인에서 차별 없이 함께할 수 있어 재밌다. 물론, 비록 관리자들은 모두 한국인인 것 같지만... 물건들 운반하는 바퀴달린..암튼 그걸 타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언니들의 미소가 피로를 다 씻는다. 

민감함을 잃지 않고, 무뎌지지 않고, '그러려니'를 경계해야지, 하고 생각하는데..역시나 몸은, 하루째보다 이틀째 되니 좀 덜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그래도 라인속도는 넘빨라..숨을 못쉬겠어...ㅎ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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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S(2012,8,6~ l 2012. 8. 8. 23:59

에어컨온도 17도인 네모난 건물에 앉아서 트레이를 뽑아 지그재그로 '접어'놓는데, 서늘한 정선 혹은 따땃한 비닐하우스에 앉아 모판을 뽑던 농활이 생각났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라인에서도 살짜쿵 언니들과 통성명을 하고, 말을 트는 순간에도.. 밭고랑을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시끌벅적 하던 그 들판이 떠올랐다.

다르지만, 닮았다. 생산의 공간, 노동의 공간이란.. '사람'이 있고, '협동'이 있고, 힘겹지만 잃지 않는 '미소'도 있고, 땀도 있다.

얼마나 순하고 예쁜 얼굴들이시던지...@_@따뜻했다.

자본의 분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관리자와 말단 ... 소름돋는 순간도 많았다. 하청에 하청, 아웃소싱, 파견, ... 최저임금 4580원에 잔업에 특근.. 저녁 8시 30분부터 아침까지 돌아가는 야간조에,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라인, 돌아가며 쉬고, 돌아가며 먹는 밥... "쉴틈이 없어요 쉴틈이 없어요 랜덤 랜덤"도 생각났다...;_; 계속 그런 건 아니었는데, 정말 시계 볼 틈 없을 때도 있었다...라인 넘빨라...초착취..

...저는오늘부터 갤럭시3의 제작공정을 조금조금 알아가고있습니다..*_*


노동자연대 다함께의 소책자, 마르크스주의와 종교를 읽으며


유물론과 관념론을 배웠고, 소외와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언제부턴지 기억나지 않을만큼 어렸을 때부터 난 신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볼수록 종교에 대해 무지해선 안되겠다는 것을 느꼈고, 이 소책자도 그 점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말한다.



"사회의 변화가 종교에 반영되는 한편 종교도 계급투쟁에 영향을 미친다. 중동이나 북아일랜드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심지어 우리 나라에서조차 종교는 여전히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은 종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종교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이 책은 세 가지를 말한다. 


1. 유물론적 관점으로, 종교의 외피 뒤의 사회 현실을 보기. 종교인들이 억압에 저항한다면 함께하기.

2.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주의적 원칙' 포기하지 않기, 그 원칙이라 함은 사회 분석, 변혁 전략을 잊지 않는 것.

3. 종교에 대해 비례감각 없이 지나치고 귀에 거슬리는 비판은 하지 않기. "모든 때 모든 곳에서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추상적이고 전적으로 이론적인 선전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사람들의 아편" 이라고 한 맑스의 말에서 두 가지 핵심을 잡아야 한다.


1. 종교도 마약도,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허위의식이다.

2. 그런데 종교도 마약도, 소외에서 비롯하는 상처에 대한 위로이고 위안이다. 하지만 이는 또다시 소외로 이어진다. 소외의 진정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종교적 소외'는 온전한 자아를 잃게 한다. 신에 예속시키기 때문이다.






'소외'가 종교의 토대이다. 소외는, 사회 전체에 대한 무력감이고, 자기 주위 세계를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프로이트는 종교의 본질이 '자신의 무기력을 견뎌내고 싶은 인간의 소망 성취'라고 말했다. 소수 지배계급과 다수 피지배계급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외를 겪는다.



"사람들은 외부세계가 낯설다는 느낌 때문에, 무력감 때문에, 사회로부터 또는 주변 세계로부터 유리돼있고 뭔가 상처를 받았다는 느낌 때문에 마약을 사용한다. 이런 느낌은 바로 소외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내용 결여를 깨닫고 있다. 그러나..'신'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정직하고 단호하게 돌아가야만 인간은 한번 더 인간성을, 자신의 본질을 획득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거대한 물질적 진보를 낳았지만, 불평등과 빈곤을 막지 못했다. 불합리한 체제에서 사람들은 불합리한(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위안을 얻곤 한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를 미신은 매우 단순하게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과학이 제공할 수 없는 부분이다.


"흔히 과학과 세속 윤리, 세속 철학은 부도덕과 비윤리가 횡행하고 심지어 때로 (부도덕과 비윤리가) 이점(利點)이 되는 사회에서 도덕의 근거,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제공하지 못한다. 반면에 미신과 종교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도덕률, 위안, 그리고 희망(비록 불가사의한 희망일지라도)에 찬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런 불확실한 세계에서 뭔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종교나 맑스주의나 비슷하지 않은가? 맑스주의와 종교는 어떻게 다른가?



맑스주의는 기계적 숙명론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필연성'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철폐와 새 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에 이따금씩 나서는 '경향'이 반드시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맑스주의는 유물론에 기초한다. 유물론은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바로 '의식주'라는 물질적 기반이다. 이를 토대로 인간의 역사를 조리있게 설명한다.


반면 관념론은 '사상 자체가 역사의 추진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상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사회적 근원'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지닌다.





모든 관념에 물질적인 근원이 있기는 하지만, 물질적 조건들과 사람들의 관념 사이의 관계가 단순하거나 기계적이지는 않다. 맑스는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악몽처럼 산 사람들의 두뇌에 무거운 짐이 된다"고 했다. 일단 관념이 생겨나면 어느정도 그 사회적 근원보다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스스로 변한다. "사회 변화의 행위자는 개개의 지도자나 종교나 민족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 구조에서 비롯하는 사회 계급들이다. 사람들은 주어진 역사적 조건 하에서 자신에게 던져진 문제를 집단으로 해결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관념이라는 게 변한다는 것이 핵심.






결정적으로 맑스주의는, 고정 불변의 '교리'가 아니다.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사상이고, '실천의 검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변화하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보완된다.






소책자를 읽으며, 내가 인상적이었던 구절에 밑줄을 긋고, 공책에 배껴쓴 내용들을 잠시 정리해 보았다. 소책자에는 좀더 풍부한 내용들이 있고, 내가 언급하지 않은 주제들도 있다.






또 하나의 인용으로 이 포스팅을 마무리하고 싶다.




"사회주의자는 종교가 번성하는 원인인 자본주의에 맞서 사람들이 불가사의한 종교 신앙에서 위안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되는 세계를 위해 투쟁한다. 그런 사회는 의식주 등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뿐 아니라, 창의성, 예술, 감정적, 정신적 만족 등에 대한 필요도 충족시켜 주는 사회다.

  인류에게는, 자신이 만들어 놓고도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에서는 인류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그렇듯이 '종교'도 '말라죽을' 것이라는 표현, 그 이미지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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