奧宣曦 : starry miaow : SUNNY :-)

눈을 떠야 한다

세상 l 2014. 10. 18. 09:24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민규 '눈 먼 자들의 국가'


http://m.huffpost.com/kr/entry/6000960

세월호를 잊자는 당신에게 보내는 손석희 앵커의 편지 (동영상)




행복

카테고리 없음 l 2014. 1. 2. 15:26
앞머리짜름으로 느끼는 소소한 행복;-)

To love and to be loved is the greatest happiness in this world.

천일문의 57번 문장을 실감하는 나날들.

내 곁에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또 사람들이 있고, 나의 삶은 옳은 방향을 향해있는데, 그럼에도 내가 불행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때문이리...

다시 한번 삶에 대한 의지를 다잡는 2014년의 출발.

http://kor.list.or.kr/articles/article_view.htm?Div1=8&Idx=1115



<한국과학소설> 
탈식민성을 사고하고, 포스트휴먼을 상상하는 과학소설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와 듀나의 『태평양 횡단 특급』
 김동식(문학평론가)

1. 과학소설의 위상과 통과의례적인 독서 

공상(空想, daydream).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어로 Science Fiction을 번역했을 때 관용적으로 부가(附加)되었던 말이다. 오랜 동안 한국에서 과학소설은 공상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유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특별하게 과학소설에 대해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식민지, 해방, 전쟁, 분단, 정치적 독재, 민주화, 산업화를 숨 가쁘게 경험해 왔다. 분단, 독재, 민주화, 산업화 등과 같은 현실의 문제들과 직면하다보니 로봇, 우주여행, 복제인간, 사이보그, 시간여행 등은 현실적 근거를 찾기 어려운 공상에 가까웠다. 한국인들은 과학소설을 통해서는 해결되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했고, 과학과 기술을 자신의 삶의 조건으로서 성찰할 여유를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과학소설이 주변적인 위상을 점유하기는 했지만, 과학소설은 꾸준하게 번역되고 출간되었다. 1907년에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가 부분 번역되었고, 1925년에는 카렐 차페크(Karel Capek)의 『Rossum’s Universal Robots』이 계급문학으로 번역된 바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독재 체제 아래에서는 조지 오웰의 『1984』가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알레고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학소설과 관련된 일반적인 독서관행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적절한 용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통과의례적 독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아동용 버전을 통해서 『프랑켄슈타인』, 『해저 2만 리』, 『화성침공』 등과 같은 과학소설의 정전(canon, 正典)을 읽는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과학소설 읽기는 할리우드의 SF영화 관람으로 대체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예로 들자면, 대부분의 성인들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감상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문화적 취향을 간직하거나 또는 영화를 통해서 과학소설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 등의 과학소설의 주요한 작품들을 원본 또는 번역본으로 읽어 왔다. 열렬한 독자들 중에는 과학소설의 충실한 독자로 남은 사람도 있고, 과학소설의 번역가가 된 사람도 있고, 과학소설 작가를 꿈꾸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한국의 과학소설은 그 저변을 넓혀올 수 있었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복거일과 듀나는 과학소설의 마니아(적 독자)에서 과학소설 작가로 전신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들의 과학소설은 리얼리즘이 주류인 한국문학에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2. 탈식민성(postcoloniality)을 사고하는 과학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 

1987년 문학과지성사는 장편 『비명(碑銘)을 찾아서』를 출간하면서 복거일이라는 신인 소설가를 데뷔시킨다. 한국의 대표적인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는 그 이전까지 과학소설을 발간한 적이 없었으며, 장편소설 출간과 함께 신인작가를 등단시킨 적도 없었다. 복거일의 등단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작가의 이력 또한 매우 특이했다. 복거일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한 후 은행과 무역회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1983년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 집필에 뛰어들었다. 4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 『비명을 찾아서』였다. 놀랍게도 『비명을 찾아서』는 과학소설의 기법을 원용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출간할 당시에 복거일의 나이는 39세였다. 39세의 작가가 내놓은 과학소설,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명을 찾아서』는 한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여전히 유지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 代替歷史)이다. 대체역사는 과학소설의 중심적인 기법은 아니겠지만, 과학소설의 계보 속에는 대체역사가 주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이겼을 경우를 가정한 워드 무어(Ward Moore)의 『희년(禧年)을 선포하라』(Bring the Jubilee, 1953),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했을 때를 가정한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높은 성의 사람들』(The Man in the High Castle, 1962), 조지 워싱턴이 사망으로 미국의 국가 수립이 무산된 상황을 가정한 해리 해리슨(Harry Harrison)의 『대서양횡단 터널, 만세!』(A Transatlantic Tunnel, Hurrah!, 1972) 등은 대표적인 과학소설이자 대체역사이다. 복거일은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도 홀로 서구의 과학소설들을 찾아서 읽어왔던 것이다. 

“노예가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노예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식민지의 경험은 한 민족의 넋에 드리운 그림자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다.”(189면)

실제의 역사에서 한국은 1910년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배에 놓이게 되었고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해방되었다. 1961년부터 군부에 의한 정치적 억압이 구조화되었고 그에 맞서 민주화운동 또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비명을 찾아서』는 1987년까지도 한국이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한국의 언어와 역사를 완전히 잊어버렸고, 일본인과의 민족적 차별 속에서 살아간다. 일본제국은 식민지의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1960년대부터 군부가 장기집권하고 있다. 한국인인 기노시다 히데오(木下英世)는 대기업의 사원으로 일하는 시인이다. 그는 한국어와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일본 정부에 의해 사상범으로 몰리게 되고 결국에는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上海)로 망명하게 된다. 그는 무엇을 찾아서 떠났던 것일까. 자신의 비명에 새겨질 이름이 그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노시다 히데오와 박영세(朴英世) 중에서 자신의 비명에 새겨질 이름을 선택할 자유.

식민지와 자유는 양립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닌 것이다. 만일 조선이 독립한 다음에도 조선 사람들이 참다운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만일 조선이 지금의 일본과 같은 나라[군부 독재가 유지되는 나라-인용자]가 된다면, 조선 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당연히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284면, 조선은 한국의 다른 이름임.) 

『비명을 찾아서』는 두 가지의 상황을 문제삼는다. 하나는 식민성과 관련되며, 다른 하나는 정치적 독재와 관련된다. 복거일은 식민성과 독재의 극복을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문제로 사고한다. 식민지적 상황과 정치적 독재를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이념적 지향은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복거일의 사유는 민족주의를 우회하여 자유의 이념에 도달한다. 식민 지배와 정치적 독재는 자유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와 민주주의를 함께 사고하는 과학소설, 또는 『비명을 찾아서』. 

3. 포스트휴먼(posthuman)의 서늘한 악몽: 『태평양 횡단 특급』 

한국에서 퍼스널 컴퓨터가 일반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1990년대 초반에는 전화와 컴퓨터를 연결한 PC통신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한국에서 PC통신은 매우 중요한 문화사적 의미를 갖는다. PC통신의 BBS(Bulletin Board System, 게시판)서는 과학소설이나 호러 영화 등과 같은 비주류 문화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었고,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문화적 신념을 공유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특히 게시판(BBS)에서 글을 쓰고 읽는 문화적 실천(practice)을 통해서 하드코어 독자에서 잠재적인 저자로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적 흐름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으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지만, 한국에서 PC통신은 하위문화의 전자(電子)적 요람이었으며 취향(taste)의 부족화(tribalisation, 部族化)를 가능하게 한 기술(技術)적 토대였다. 이와 같은 디지털 매체 환경 속에서, 듀나(DJUNA)는 탄생했다.
“아이디를 만들 때 Djuna Barnes의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쓴 것이죠.” 듀나는 인터넷 아이디(ID)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소설과 영화평론을 쓰는 그 누군가의 아이디이다. 현재까지 듀나의 본명이나 성별, 나이, 학력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듀나에 대해서 1명의 여성이라는 설과 3명으로 구성된 공동창작집단이라는 설이 떠돌 따름이다. 오직 메일로만 청탁서와 소설을 주고받으며, 인터뷰도 채팅이나 메신저를 이용한다. 듀나는 1994년부터 PC통신에 SF 단편과 영화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97년 과학소설 단편을 모은 『면세구역』(免稅區域)을 출간했으며, 2002년에는 『태평양 횡단 특급』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면서 그 문학적 위상을 인정받게 된다. 
『태평양 횡단 특급』은 과학소설의 은하(galaxy)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의 발걸음에 비유할 수 있다. 과학소설 마니아답게, 듀나의 작품에는 과학소설들이 폭넓게 참조된다. 단편 「첼로」는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로봇 단편소설에 바탕을 두었고, 「스퀘어 댄스」는 애드가 앨런 포(E. A. Poe)의 「함정과 진자」를 모방하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이다. 그밖에도 H. P. 러브크래프트(Lovecraft), 해리 해리슨,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astner), 잭 피니(Jack Finney) 등 많은 과학소설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듀나 자신이 밝힌 바 있다. 듀나가 발표한 픽스업(fix-up: 각기 독립된 이야기를 전개하는 연작 단편 시리즈) 형태의 단편들은, 그/녀가 읽었던 과학소설들에 대한 오마주(Hommage)와 영향의 불안(anxiety of influence)을 동시에 보여준다. 듀나의 작품들은 과학소설의 계보 속에서 태어나며, 과학소설의 은하를 여행하는 새로운 항로를 탐색한다. 

나는 그녀가, 인간들이 그들을 넘어 먹이 사슬의 맨 위에 서는 것처럼 부당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도시는 서서히 인간의 가치를 넘어 자신만의 문명과 지성을 발전시키는 중이었다.(「기생(寄生)」, 140면) 

단편 「기생(寄生)」을 비롯하여, 『태평양 횡단 특급』에는 포스트휴먼과 관련된 독특한 사고와 상상력이 표현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듀나의 작품에는 기계라는 도구에 의해 펼쳐질 편리함의 유토피아도,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인간소외의 디스토피아도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소외를 가속화하는 기계문명을 넘어서 인간적인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을 닮은 기계를 지향하는 안드로이드(android)적인 상상력도,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사이보그(cyborg)적인 상상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듀나는 기계와 인간에 대한 매우 일반화된 전제와 기대를 문제 삼는다. 기계는 어떠한 경우이든지 간에 인간을 위한 기계여야 한다는 전제와 기대가 그것이다. 듀나의 작품들에서 기계는 스스로를 만드는 기계, 자기생성(autopoiesis)적인 기계, 스스로 진화하는 기계이다. 기계는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진화의 다른 단계 또는 계통이다. 인간과 기계의 불균등한 공진화를 관찰하는 듀나의 시선 속에서, 우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여기는 인간중심주의는 그 근거를 잃어버린다. 

4. 과학소설 또는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의 원천 

한국문학의 역사에서 그리고 한국과학소설의 역사에서, 복거일과 듀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정치적 독재가 30년 가까이 이어져 오던 시절에, 복거일은 자신의 정치적 무의식을 과학소설의 플롯 속에 담아냈다. 한국사회의 식민성을 성찰하는 동시에 정치적 억압구조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의 탈식민주의적 문제의식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은 민주화를 달성하고 산업화의 완성단계에 접어들게 되며 정보화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듀나는 과학기술이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는 원리라는 인식이 일반화된 시대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작가이다. 듀나는 서양 과학소설의 전제들을 다시 사고하며 인간과 기계에 대한 포스트휴먼적 상상력을 제기한 바 있다. 이제 복거일은 70을 바라보는 원로 작가가 되었고, 듀나는 40을 넘은 중견 작가로 자리 잡았다. 복거일과 듀나 사이에는 한국의 과학소설이 지난 25년간 만들어낸 지층이 가로놓여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과학소설은 (새로운)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들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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