奧宣曦 : starry miaow : SUNNY :-)

당과 계급

세상 l 2012. 6. 20. 17:27


[편집부] 이 글은 크리스하먼이 1968년에 쓴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는 이 논문을 소책자로 출판하기 위해 1986년 6월에 붙인 머리말에서, 이 글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함을 갖고 있으므로 독자는 주의하기 바란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그대로 인용해 본다.


 첫째, [나의 주장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할 때 직면하는 엄청난 실천적 · 정치적 문제들, 즉 혁명적 조직이 원칙에 바탕을 둔 정치를 노동계급의 가장 투쟁적이고 능동적인 부문과의 유기적인 연계와 결합시키는 데 꼭 필요한 갖가지 '우여곡절들'을 다루지 않고 있다. ...


 둘째, 때때로 이 팸플릿의 주장은 '주지주의적'이다. 그것은 당이 '신입 당원들을 고참 당원의 인식 수준으로 끌어올릴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물론, 신입 청년 당원들은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승리보다는 패배로 점철되는 시기에 혁명가로 살아남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필요한 사상들을 가장 잘 이해시키는 것이 항상 고참 당원들인 것은 아니다. 흔히 그들은 계급투쟁이 침체해 있는 시기에 인내심을 잃고 지치곤 한다. 오히려 신입 청년 당원들의 정력과 열정만이 그들 고참들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이 팸플릿은 '자신의 활동과 나아가 당의 활동을 진지하고 과학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당원 자격을 제한하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즉, 당은 투쟁이 이러저러한 당면 쟁점뿐 아니라 체제 전체에 맞서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가입시킴으로써 당원수를 부풀리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오직 그러할 때만 당이 모든 피착취 · 피억압 인민들의 요구에 ㅡ특정 부문에 한정된 투쟁의 요구가 아니라ㅡ 기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은 소규모 혁명조직이 명민한 신참 당원들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희석'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신참이든 고참이든 간에 당원들이 자신들이 관여하고 있는 특정 활동은 훨씬 더 넓은 혁명적 투쟁의 단지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잊는 것이야말로 더 위험한 일이다.




1. 들어가는 말


마르크스주의자 진영 내에서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만큼 신랄한 논쟁을 일으킨 주제는 없었다. 다른 어떤 주제보다 바로 이 주제를 놓고 열띠고 쓰라린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 몇 세대에 걸쳐 혁명가들 사이에서는 "관료", "대리주의자", "엘리트주의자", "독재자" 등의 딱지를 붙이는 일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의 밑바탕을 이루는 원리들은 흔히 혼동되어 있었다. 문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예컨대, 1903년에 당 조직의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분열했을 당시 레닌 분파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1917년에는 레닌의 정반대편인 바리케이드 저편에 선 (예컨대 플레하노프) 반면에 트로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가들은 1903년에는 레닌에 반대했다. 이러한 혼동이 우연의 일치인 것만은 아니다. 혁명가들의 논쟁에서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된 일이었다. 코민테른 제2차 전당대회에서 트로츠키가 한 말은 돌이켜 볼 만하다. 그는 거기서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대중이 당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다는 파울레비의 주장을 반박했다. 트로츠키는 상황이 그보다 훨씬 더 복합적임을 지적했다.


   만약 문제를 추상적으로 제기한다면 제 눈에는 한편에는 샤이데만이 보이고 다른 한편에는 미국이나 프랑스 또는 스페인의 생디칼리스트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후자는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 샤이데만과 달리 그들을 진심으로 박살내고 싶어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저는 스페인이나 미국 또는 프랑스의 동지들에게 그들이 역사적 사명을 성취하려면 당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과 토론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저는 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동지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이 점을 입증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수에게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과 샤이데만의 오랜 경험을 대비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와, 당의 필요성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르노델 같은 자 또는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동지'라고 부르고 싶지조차 않은 앨버트 토마스 같은 신사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이 있습니까?


  트로츠키가 언급한 어려움 ㅡ사회민주주의자들과 볼셰비키가 모두 다 "당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뜻하는 바는 완전히 달랐다는 사실 ㅡ 은 스탈린주의의 등장 이후 더욱 가중되었다. 볼셰비즘의 언어는 그것을 정식화한 사람들이 의도했던 목적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더구나,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적 전통에 계속 서 왔던 사람들조차 1920년에 트로츠키가 했던 지적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이 너무나 흔했다. 그들은 당의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흔히 "경험"에 의존했지만, 그 경험은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이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혁명가들 사이에서조차도 논쟁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스탈린주의적이거나 사회민주주의적인 조직관에 대한 찬반토론이 될 것임을 주장할 것이다.


  또한, 레닌의 저작과 실천 속에서 암묵적으로 발전된 조직관은 이들 두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ㅡ옮긴이] 조직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10월 혁명의 이론과 실천이 스탈린주의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고 볼셰비키가 불법적 조건 속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그나마 정통 사회민주주의의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레닌의 조직관은 그 진의가 가리워졌다.



  2.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견해


  사회민주주의의 고전적 이론들은 ㅡ1914년 이전에는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도 근본적으로 도전받지 않았다ㅡ 사회주의로의 발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당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로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와 의식화가 지속적이고 순탄하게 성장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이 가능하다는 관념을 당시 거부한 카우츠키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현재로서 필요한 것은 조직적 힘과 선거상의 지지 기반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선거를 통해서든 또는 노동자 계급의 방어적 폭력을 통해서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때 당이 새로운 국가(또는 새롭게 개조된 옛 국가)를 떠맡아 그 기초를 이룰 수 있어야 하므로 당의 성장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대변자 카우츠키는 대중적 노동계급 정당의 발전을 자본주의 발전 경향의 불가피한 결과로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대립이 보다 첨예해질수록 공황은 당연히 점점 더 큰 규모로 일어나고, 인민의 다수가 결핍과 곤궁의 상태로 더욱 깊이 빠져들어가며, 호황은 더욱 짧아지고 공황은 더욱 길어진다. 이것은 더욱 많은 노동자를 기존 질서에 대한 "본능적인" 대항으로 몰아넣는다.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독자적인 과학적 탐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사회적 법칙에 대해 명확한 통찰"을 갖는 수준으로 그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존재한다. 그 같은 운동은 계급 적대에서 비롯하는 것으로서, "결국에는 승리하기 마련이다." "혁명은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필연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에 뒤따르는 중심적 매커니즘은 의회 선거라는 메커니즘이다(비록 카우츠키조차 1905~6년 직후의 시기에는 총파업 사상을 말했지만). "무장봉기가 오늘날 어떤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것[의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들의 경제적 · 사회적 ·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끌어올리는 데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노동자 계급이 의회를 활용할 때 "의회는 그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도구가 아니게 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 같은 활동은 필연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를 가져오고, 또한 사회주의 정당이 의석의 다수를 확보하여 정부를 구성하게 될 상황을 창출하게 마련이다. "[노동자 당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의 이익을 위해 정부의 장악을 목표로 삼게 된다. 경제 발전은 이러한 목적을 자연스럽게 달성시켜 줄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제1차세계대전 이전의 40년간 서유럽 전역에서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기본 원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적어도 좌익계로부터는 거의 도전받지 않은 채 지속되어 왔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지지에 대한 레닌의 경악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흔히 지나치는 사실은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좌익계의 카우츠키 비판자들조차도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이론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계급의식 발전에 관한 이론의 기초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카우츠키주의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대체로 카우츠키의 전반적인 이론적 지형 내에 머물러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중심 사상은 당이 계급을 대표한다(REPRESENT)는 것이다. 실제로 카우츠키 자신은 당이 없이 노동자들이 하게 될 "시기상조인 혁명"의 위험에 대한 거의 병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는 권력을 장악하는 주체가 반드시 당이어야 했다. 그 밖의 다른 형태의 노동자 계급 조직과 활동이 유용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정치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속되지 않으면 안된다. "노동조합의 이러한 직접적 행동은 의회 활동을 대신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조하고 강화하는 것으로서만 실효를 거둘 수 있다. "



3. 혁명적 좌익의 이론과 사회민주주의의 이론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적 견해가 누구로부터도 (당 자체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들을 제외하면) 명시적으로 도전받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1917년 이전에 당 조직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논쟁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노동자 계급 대중의 자주적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정통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사람들조차도 사회민주주의의 견해에 내포된 전제들을 공유하였다. 이것이 단순히 이론적인 결함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당시로선 파리 꼬뮌이 노동자 계급 권력의 유일한 경험이었고, 그것은 압도적으로 소부르주아적인 도시에서 두 달밖에 지속되지 못한 것이었다. 1905년 혁명조차도 노동자 국가가 실제로 어떻게 조직될 것인가에 대해 가장 맹아적인 형태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노동자 권력의 근본적인 형태 ㅡ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ㅡ가 인식되지 못한 채로 지나쳤다. 그리하여, 1905년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트로츠키도 1905년 혁명의 교훈에 대해 분석한 <<평가와 전망>>에서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혁명의 사회주의적 내용을 당시 거의 혼자서 예견하였으면서도 트로츠키는 그것이 취하게 될 형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은 무엇보다도 권력의 문제이다. 즉, 국가 형태(제헌의회, 공화국, 합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사회적 내용의 문제인 것이다."


  1905년 혁명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반응이라 할 수 있는 <<대중파업>>에서도 비슷한 누락이 보인다. 2월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소비에트는 레닌의 글과 사고 속에서 중심적인 것이 되었다.


  혁명적 좌익은 당이 직접 노동자 국가를 가져온다고 보는 카우츠키의 입장을 결코 다 받아들인 적은 없다. 예컨대, 룩셈부르크의 글들에는 당의 보수성에 대한 인식과 아주 초기 단계부터 대중이 당의 바깥에서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사회민주주의의 공식 입장에 대해서 결코 명시적으로는 거부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의 필요한 내부 조직 문제에 대해 명확해지기가 힘들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모델을 거부하지 않고는 혁명적 조직에 대한 진정한 토론은 그 시작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룩셈부르크의 경우에 가장 분명하게 해당된다. 당에 대한 필요성을 무시하는 '자생성'의 이론을 그녀에게 돌리는 함정(스탈린주의자들과 자칭 룩셈부르크 추종자들이 함께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서는 안될 것이다. 당의 필요성과 당이 수행하게 될 적극적 역할에 대한 강조는 그녀의 저술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러시아에서 사회민주당은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 하나의 역사 시기 전체를 메워야 한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현재 그들의 '원자화된' 상태 ㅡ 전제정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ㅡ로부터, 그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목표를 자각하게 되도록 도와주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는 계급 조직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는 대중파업의 기술적 준비와 지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체 운동의 정치적 지도에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개명(開明)되고 가장 계급의식적인 전위이다. 그들은 숙명론적으로 팔장을 끼고 '혁명적 상황'의 도래를 기다릴 수 없으며 기다려서도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역할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글들에는 계속되는 애매함이 있다. 그녀는 당의 지도적 역할이 너무 커서는 안된다는 점에 일관된 문제의식을 두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도 어쨌든 필수적인 것으로서 본 '중앙집중주의'(사회민주주의는 대체로 어떤 형태의 지역주의나 연방주의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를 "그 같은 기관(즉 중앙위원회)에 내재하는 보수성"과 동일시하였다. 이 같은 애매함은 룩셈부르크가 실제로 관여했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지도적 인물이었지만, 그 당의 활동 방식에 대해 항상 불안해 했다. 그녀가 실제로 중앙집중주의의 위험성을 드러내고자 했을 때 지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현재 전술적 정책은 굳건할 뿐 아니라 또한 유연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 당이 의회 체제에 적응하게 된 표징이다. ...... 그러나 이러한 적응이 완벽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우리 당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1914년에 일어나게 될 일[SPD가 국제주의를 저버리고 전쟁공채발행에 찬성표를 던진 일ㅡ옮긴이]에 대한 명민한 예언자적 구절이긴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SPD의 증대되는 동맥경화증과 형식주의의 원인을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이것에 맞서 싸우는 방식을 지시해 주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그녀가 보기에는 의식적인 개인들과 집단들도 이 추세를 거스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타성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 정치 상황의 진로와 형태를 추상적 가정들이라는 진공 속에서 규정하기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의 관료화를 오직 당의 응집성과 효율성을 제한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여겼다. "다수의 이익을 위한 다수의 자기의식적인 운동"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것은 조직과 의식적 지도의 특정 형태가 아니라 조직과 의식적 지도 자체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것이 의식적인 것에 선행한다. 역사의 논리가 역사 과정에 참여하는 인간들의 주관적 논리에 선행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 기관이 보수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주장에는 올바르고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어떤 조직이 급변하는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는(또는 하려는 용의가 없는) 경향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1919년 이탈리아 사회당 최대강령파나 1914년 제2인터내셔널 '중도파', 또는 1917년 멘셰비키 국제파나 1923년 독일 공산당을 상기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심지어 볼셰비키조차도 그 같은 보수성을 드러내는 매우 강한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을 하면서도 룩셈부르크는 그 근원을 파헤쳐 보려 하지 않았으며ㅡ인식론적 일반 명제 차원의 시도를 제외하면ㅡ, 또한 조직적 교정책을 찾아내려 하지도 않았다. "무의식적인 것"이 "의식적인 것"을 정정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녀의 희망에는 강한 숙명론이 내재해 있었다. 대중운동의 독특한 발전 템포에 대한 뛰어난 민감성ㅡ특히 <<대중파업>>에서ㅡ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같은 자생적 발전을 동력화시킬 수 있는 정치조직[당과 당을 지향하는 조직을 뜻함-옮긴이]에 관한 명확한 인식을 확립해 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심하게 움츠려든다. 관료적 형식주의와 의회백치증에 대한 이 가장 신랄한 비판자가 다름 아닌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내 논쟁에서 이러한 결함의 가장 완벽한 역사적 구현체가 될 분파인 멘셰비키를 옹호하였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이미 독일에서 세기의 전환기부터 발전하여 1910년에 완전히 형성된 카우츠키주의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이후 5년 동안에도 구체적인 조직 형태를 취하지 못했다.

  룩셈부르크의 입장과 트로츠키가 1917년에 이르기까지 고수한 입장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트로츠키 역시 관료적 형식주의의 위험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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